싸리꽃이 한차례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졌다. 못다 핀 꽃송이들이 조금씩 나풀나풀 피어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오솔길의 정취를 더해준다. 그런데 싸리꽃을 꽃으로 봐주고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금 한글 워드로 ‘싸리비’를 입력하면 맞춤법 표시에서 빨간 밑줄이 쳐지지 않는데 ‘싸리꽃’이라고 치면 빨간 밑줄이 생긴다. 싸리비 즉, 싸리 빗자루는 우리의 뇌리에 익숙하지만 싸리꽃은 별로 의식하지도 바라봐 주지도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싸리’라고만 해도 싸리꽃을 떠올리는 것이 우리 정서일까? 싸리비, 싸리울, 싸리회초리, 싸리젓가락, 싸리윷 등등 생활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싸리. 그 줄기가 아주 요긴하게 쓰이는 싸리에 대해 그 꽃이 어떤 색깔인지 어떤 모양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휘휘 휘늘어진 싸리 가지에 보랏빛을 띤 핑크색으로 나풀나풀 줄지어 피는 싸리꽃을 보라! 그 휘늘어진 모습에서 동양의 선(線)과 고운 새색시 모습도 보인다. 이영노의 『한국식물도감』에 보면 우리나라의 싸리 종류가 33가지나 된다. 작은 타원 모양을 한 잎들은 조금 동그랗거나 길쭉하거나 비슷비슷한데 싸리꽃들의 모양은 참으로 여러 가지여서 부디 꽃도 좀 봐 달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얀 싸리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싸리꽃을 읊은 우리 시조를 찾아보았다. 아무래도 싸리는 빗자루나 회초리를 만드는 ‘비천한’ 수종이라고 여겼는지 우리 시조문학에서는 싸리나무도 싸리꽃도 보이지 않는다. 서민적인 가사문학에서는 더러 싸리가 등장하는데 좋은 ‘땔감’으로 읊고 있다.(싸리는 줄기에 기름기를 포함하고 있어서 습해도 잘 타고 연기가 나지 않고 오래 타서 땔감으로 가장 좋았다.) 싸리가 우리 시에 등장하는 것은 역시 현대에 와서이다. 조지훈의 「피리를 불면」의 후반부를 보자.
다락에 기대어 피리를 불면
꽃비 꽃바람이 눈물에 어리어
바라 뵈는 자하산 열 두 봉우리
싸리나무 새순 뜯는 사슴도 운다.
‘싸리나무 새순 뜯는 사슴’이라는 표현은 우거진 숲이 아닌 정겨운 산비탈의 풍경을 연상케 하고, 작은 콩잎 같은 싸리순이 피리소리와 어우러지며, 그 피리소리와 비슷한 사슴 울음도 들린다. 하긴, 싸리꽃은 한자로 ‘녹명화(鹿鳴花)’ 즉, ‘사슴이 우는 꽃’이라고 하여 사슴이 짝짓기 하는 가을의 계절감각을 느끼게 한다. 조병화의 「하루만의 위안」은 싸리꽃이 ‘위안’의 공간으로 등장한다.
하루만의 위안
잊어버려야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 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 날이 온다. 그 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 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 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에서 붙잡고 싶지만 떠밀려 스쳐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회한을 이야기한다. 무언가를 애써 잊고자 하는 표현에서 왠지 역설적으로 더 절실하게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한데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은 단 하루만이라도 그 마음을 쉬고 싶은 공간이다. 싸리꽃은 영원한 우리의 ‘향수’의 언어이기도 함을 말해준다. 우리와 달리 싸리꽃에 대한 일본인들의 정서는 특별나다. 시에서 가장 전면에 등장하며 회화(繪畵)에도 주된 소재가 된다. 지난 5월호 〈산림〉에서 화투의 4월 흑싸리가 사실은 싸리가 아니라 등꽃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7월 ‘홍싸리’라고 알려져 있는 것은 싸리가 맞으며 그것도 꽃이 핀 싸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멧돼지가 등장하는 것은 싸리꽃이 피는 초가을에 멧돼지 사냥을 즐겼기 때문이다. 멧돼지뿐만 아니라 앞서 보았듯이 가을 산야에 뛰어노는 사슴도 자주 등장한다. 일본에서는 싸리를 ハギ 혹은 한자로 ‘추(萩)’라고 한다. ‘추(萩)’는 사실 한자 자전을 보면 ‘사철쑥 추’라고 나와 있어 싸리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추(萩)’를 싸리로 쓰는 것은 일본뿐이다. 일본에서는 한자의 의미들이 많이 전용되어 쓰이고 있는데 ‘추(萩)’가 싸리가 된 것은 가을 ‘추(秋)’위에 풀 ‘초(초)’가 있으므로 가을의 대표적인 꽃이라는 의미에서 정착된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싸리는 일본의 시가에 있어서 가을의 꽃으로 국화(菊花) 이상으로 자주 등장하는 꽃이다. 싸리는 콩과의 낙엽 관목, 즉 나무인데 일본 문학에서는 풀꽃처럼 인식되었다. 가을의 7가지 풀꽃(秋の七草, 싸리, 억새, 칡꽃, 패랭이꽃, 마타리, 등골나물, 도라지) 중에 가장 으뜸으로 취급되며 우리나라와는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나라시대(710~794)부터 이미 뜰에 심었던 것으로 보이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인 『만요슈(万葉集)』에 나오는 160가지의 식물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며 141수의 싸리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헤이안시대(794~1192)에 들어오면 궁중에도 많이 심었음을 두루마리그림 에마키(繪卷)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11세기 초에 쓰여진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는 히카루겐지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 무라사키노우에가 병이 깊어 목숨이 서서히 잦아들 때 싸리꽃에 맺힌 이슬로 자신의 신세를 읊고 있다.
(이슬이) 앉은 것을 / 보는 것도 잠시인걸요 / 살짝만 닿아도 바람에 흩어지는 / 싸리꽃 위의 이슬 おくと見るほどぞはかなきともすれば 風に亂るる萩のうは露
싸리꽃 위에 앉은 이슬은 바람에 일렁이며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허무한 목숨의 비유이다. 겐지는 애틋해하며 이렇게 화답한다.
살짝만 닿아도 / 앞다투어 사라지는 / 이슬 같은 세상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고 / 함께 사라지고파 ややもせば消えをあらそふ露の世に後れ先だつほど경ずもがな
살짝만 닿아도 앞다투어 사라지는 싸리꽃의 이슬처럼 함께 사라지고 싶다고 하고 있다. 양녀인 아카시 중궁도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 무라시키노우에를 보내며 시를 읊는다.
가을바람에 / 머물지도 못하고 / 지는 세상이 어찌 풀잎 위의 / 이슬뿐이겠어요 秋風にしばしとまらぬ露の世を誰れか草葉のうへとのみ見む
풀잎의 이슬도 인간의 목숨도 모두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가을바람에 흩어진다고 한다. 최근 쓰나미로 일시에 파도 위의 낙엽처럼 사라져간 일본인들을 보면 싸리 위의 이슬을 보고도 허망한 삶을 생각하는 그들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늘고 길게 휘어진 싸리꽃 가지가 가을바람에 일렁이며 날릴 때 이슬은 더욱 흩어지기 쉽고, 그 풍경을 바라보며 일렁이는 파도 위에 놓인 듯한 인간의 목숨을 생각했으리라. 싸리꽃의 꽃말도 ‘깊은 생각’, ‘상념’이라고 한다. 그러나 너무 깊은 생각에 빠지지는 말고 그저 싸리꽃 자체로 바라봐 주자. 조금 길거나 짧거나 어차피 인생은 찰나니까.
하얀 이슬을 흩지 않는 싸리꽃의 일렁임이여
白露をこぼさぬ萩のうねりかな _ 芭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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